며칠 후, 그는 유치장에서 평화동에 있는 교도소로 옮겨졌다. 성도들이 돌아가면서, 그를 위해 면회를 갔다. 처음에 그를 찾아 면회를 가는 날, 나는 교도소가 어디 붙어 있는지를 몰라, 임실 방향으로 한참을 내려갔다. 가도 가도 끝도 없이, 논 밖에 보이지 않아, ‘길을 잃었구나.’ 라는 직감이 들었다.
차 밖에는 농부 하나가 들판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차를 세우고, 농부에게 아주 큰 소리로 물었다.
“아저씨, 평화동 교도소가 어디에요?”
그러자, 농부가 대답을 하였다.
“잘못 왔습니다. 왔던 길로 다시 올라가세요.”
농부도 큰 소리로 대답하며, 손으로 방향을 가르쳐 주었다.
다시, 차를 돌렸다. 나는, 늦게 도착하여 면회시간이 끝난 줄 알고 헐떡거리며 교도소에 뛰어 올라갔다. 순간 얼마나 긴장을 하였는지. 다행히도 시간이 남아 있었다. 교정기관 홈페이지에 알아보니, 면회시간이 15분으로 나왔는데, 실제적으로 면회를 해보니, 7분이었다. 그것도 시간을 재가면서. 시계가 똑딱 똑딱하고 가면서, 7분이 되면, 서로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교도소 접견실에서 그를 보니,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는 나의 소중한 영적인 자식이었기 때문이다. 맨바닥에서부터 교회를 시작하여, 허구한 날 이상한 남자들이 행패를 부렸는데, 그는 아니었다. 나는 그의 모습 속에서 “숨겨진 보석”을 발견하였다. 나의 성격은 은근히 까다롭다. 호불호가 분명한 면이 많아, (고치려고 노력은 많이 하는데), 나는 특히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자식가운데도 마음에 더 가는 양이 있다. 그런데, 그는 노력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나는 그가 노력하는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섰다. 성도들도 매주, 책과 영치금을 들고 그를 찾아갔다. 돌아가면서 그를 위해 기도를 해주었다. 성도들도, 뒤 돌아서 보니, 평생에 잊지 못 할 좋은 추억으로 남아 감사하다고 한다. 정말, 제일 잘 한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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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하나님이 고치지 못 할 사람은 없다. 특히, 목사는 버리는 것을 고쳐 쓰는 것이 목사이다. 버려진 사람, 망한 사람, 영적으로 죽은 자, 성격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예수 이름으로 고쳐서 주의 백성으로, 주의 신실한 일꾼으로 만들 의무가 우리에게는 있다.
주은총목사는 경희대학교에서 법학석사를 마친 후, 한세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그녀는 또한 여성으로는 드물게 맨 몸으로 전주 꿈이 있는 교회를 개척하여, 도전과 모험의 길을 걷고 있다. 저서로는 <아, 행복한 사람아>(쿰란), <딸아, 너의 결혼은 지금 행복하니?> (쿰란)등이 있다. <거인공포증을 신앙으로 극복하라> (담장너머)등이 있다.